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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ion
It's always strange to find your writing translated, particularly when you had no idea that someone was translating you.

I can't read a word, of course, but appreciate the attention to detail evidenced in the fact that variations on the word "free" in the epigraph -- BTW, the "W" is the untranslatable initial in Theodor Adorno's translated name -- are provided in English as well.

And, yes, I'm still in 1996:
Bad Subjects
Political Education For Everyday Life

Bad Suject Issue #27 September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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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자들을 위한 페다고지 (Pedagogy of the Depressed)


찰리 버취/미국 UC 버클리 대학원 총학생회장


독일인과 영국인은 'free'라는 단어를 비용이 안 드는 물건이나 서비스를 지칭하는 데 사용한다
(아도 르노는 'free'라는 단어의 두 가지 의미[공짜와 자유]로 말장난을 하고 있다 — 옮긴이 주).
정치경 제학적 비판을 차치하더라도, 이는 이미 교환관계 자체에 가정된 '부자유스러움 unfreedom'를 증언 하는 것이다
; 모든 것이 비용을 치뤄야 하는 한, '자유 freedom'란 없다.
그리고 물신화된 사회에 서는, 단지 비루한 퇴화물만이 가격 체계에서 면제된다.
좀더 면밀히 검토해보면, 일반적으로 그 퇴화물들 역시 어느 정도 돈으로 환산될 만한 가치는 지니고 있으며,
아니면 상품이나 최소한 기부 물품과 함께 주어지는 동냥 값어치 정도는 가지고 있다
: [그렇기 때문에] 공원은 감옥이라는 공간을 그 곳[감옥]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더 견뎌낼 만한 공간으로 만들어 준다.
--테오도르 W. 아도르노



나는 어느 정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종종 대학에 대해서 미심쩍어 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곤 한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대학과 소위 '현실 세계 real world'라고 불리는 곳을 구별하면서 그 의심을 드러낸다. 다른 수많은 대학인과 마 찬가지로 나 역시 그러한 대화가 꽤 절망적이라고 느낀다. 어떻게 감히 사람들은 내가 살고 있는 인생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여길 수 있는가? 그러나 그들이 '현실'이라는 단어를 선택할 만큼이나 불운하게도, 사실상 그러한 구별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이 대학은 '현실 세계'에서 대학을 배제시키는 것은 대학을 인식하는 방식에 매우 많은 논란거리를 제공해 준다. 또한 이렇게 대학을 인식하는 방식은 대학의 미래에 관해서 많은 것들을 얘기해 준다.


사람들이 대학과 '현실 세계'를 구분할 때, 대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대학이라는 공간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도 매우 많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대학을 여타의 어떤 곳들과 대조할 수 있을 만큼 대학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면, 대학의 구체적인 현실에 대해 미심쩍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학이 '현실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신 이나 악마 그리고 부활절 토끼(부활절 장식품으로 만드는 토끼를 지칭함 — 옮긴이 주)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대학이 비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현실 세계'를 언급할 때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대학 내의 일상적인 활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대학을 사회의 조직적인 규칙들이 적용되지 않는 공간으로 생각하는 경향 이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규칙들의 상당수가 자본주의에 지배받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상당 부분의 시간 동안 다른 누군가를 위한 일해야 한다. 때때로 그들은 자신의 일에 호의적이다. 그리고 극소수는 흡족해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대학의 학생과 교수들은 전혀 다른 형태의 일을 하고 있다. 즉, 그들은 각자가 흥미있어 하는 분 야를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시간을 융통성있게 분배하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일하고 있을 때조차도 상대적으로 언제나 여유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재학생들은 돈벌이를 하지도 않는다. 대학원생과 교수들은 강의료를 받는데, 일주일에 단지 몇 시간만을 강의하고도 삶을 영위할 만큼의 보수를 받는다. 이같은 사실을 떠나서라도, 대학에서의 노동이라고 하 는 것은 대부분의 노동방식에서 얻어지는 '손익계산'을 가정하지는 않는다.


대학의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그리고 후에 언급하겠지만, 그 현실은 급속한 변화를 겪는다. 그러나 대학에는 부정할 수 없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대학과 사회를 구별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이 두 장소를 공간적 용어로 생각해 보는 것이 다. 대학은 떨어져 있는 공간이다. 즉, 대학은 명백히 규정된 경계에 의해 그 주변 환경과 분리되어 있는 캠퍼스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경계는 벽들에 의해 구분된다. 물론 이런 경계가 가시적이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법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 하지 만, 대학 내의 영역에서는 토지법이 다소 달라진다. 물론, 이 차이에 한계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대학이 마치 작은 국가와 같기 때문은 아니다. 대학은 주변 세계의 논리에 반하는 내부 논리를 따른다. 대학에는 주변 세계에는 없는 규칙과 의식들이 있다. 실제로, 대학은 동질성의 바다 속에 있는 또다른 섬과 같기 때문에 '현실 세계'와는 구별된다.


사회학자인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우리 시대의 불안은 의심의 여지없이 시간보다도 공간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는 논리에서 '헤테로토피아 Heterotopia'(異形空間, 원래는 '이형성'이나 '뷸균질성'을 나타내는 의학용어로서 피부 이식처럼 신체 기 관의 어느 한 부위를 절단하여 이를 다른 부위에 붙이는 것을 말하는 유전학 용어이다. 푸코는 자신의 1966년도 저서 {말과 사물} 에서 이 개념을 처음 사용했다 — 옮긴이 주)라는 개념을 전개한다. "근본적으로 비현실적인 공간"인 유토피아와 달리, 헤테로토피 아는 "적대적인 공간(conter-site)이며, 현실의 위치에 효과적으로 규정된 유토피아이다. 그리고 이것은 문화 속에서 발견되는 공간 인 동시에, 재현되고 서로 경쟁하며, 전환될 수 있는 모든 장소이다. 현실에서 그것들의 위치를 나타낼 수는 있지만, 이런 공간들 은 모든 공간의 외부에 있다"(미국의 SF 작가인 샤뮤엘 들레이니[Samuel R. Delany]는 자신의 1976년도 작품 {트리톤 : 모호한 헤 테로토피아 Triton : An Ambiguous Heterotopia}에서 푸코를 참조하여, "현실에 분란을 가져오는, 주류 사회의 내부에도 외부에도 속하지 않은 탈중심화된 사회"라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 — 옮긴이 주).


푸코는 헤테로토피아의 특정한 사례를 보여준다. 원시 사회에서 "헤테로토피아는 사회와 인간이 살아가는 주변 환경과의 관 계에서 위기에 처해 있는 개개인 — 청소년들, 생리 중인 여성들, 임신 중인 여성들, 노약자들 등 — 을 위한 특권화되어 있거나 신성시되거나 혹은 금지된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들의 일부는 젊은 사람들을 위한 기숙사 학교나 군대와 같은 형식으로 현대 사회 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분리의 헤테로토피아 crisis heterotopias'와는 대조적으로, 푸코는 현대의 지배적인 헤테로토피아의 유형은 "요양원, 정신병원, 그리고 물론 감옥"과 같은 공간인 '일탈의 헤테로토피아 heterotopias of deviation'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모든 공간은 주류 사회에서 일탈된 사람들을 위한 기관이다.


비록 푸코가 뚜렷하게 대학이라는 공간을 언급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것이 '분리의 헤테로피아'와 '일탈의 헤테로피아'의 일 면이 결합된 공간이고 생각할 수 있다. 한편으로, 대학은 이전에는 군대나 기숙사 학교가 충족시켜 주었던 사회적 기능을 대신함으 로써, 가정에서 독립해야 할 나이에 이른 젊은이들을 도와주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 규범에서 일탈한 사람들에게 일시적이든 지속적이든간에 은신처를 제공한다. 그렇지만, 더 나아가 대학은 이러한 일탈자들을 '제도화'시켜, '일반적'인 시민들의 일상 생활에 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은신처를 마련해주는 대신, 대학의 규정과 의식들을 따르게 한다.


이러한 '제도화'의 과정은 단점을 가지고 있다. 좌파적인 시각으로 보면, 이 과정은 급진주의자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회 일각에서 그들을 고립시키고 격리시키도록 위협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이것은 또한 존재 가능한 세계 중에서 '현실 세계'가 최 상의 세계가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자본주의가 승리하고, 소위 말하는 미합중국의 '민주주의'가 전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시대에, 그 승리를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제도의 지지없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대학이 명백히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그러한 제도적 지지를 제공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제도들 중의 하나로서 기 능해 왔다. 1950년대 초반, 집단적인 반공산주의적 광란의 상태가 미국 전역을 휩쓸고 있을 때, 대학은 미국의 상원의원이였던 조 셉 메카시(Joseph McCarthy)같은 사람들의 마녀사냥에 집단적으로 저항하기 위한 몇 안되는 장소들 중의 하나였다. 이 경우 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경우에도, 대학의 지도자들이 종종 정치적 압력에 움츠려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특징적으로 차별화된 조직 체계를 가지고 있던 대학의 생명력이 소멸되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이 벽 내부에서이든지 외부에 서이든지, 사람들이 대학은 사회와 당연히 불일치하는 적대적 공간이라고 인식하게끔 만들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대학의 헤테로토 피아적인 요소였다.


대학의 생명력인 이 헤테로토피아적인 측면은 오늘날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는 정치적인 책략에 의 한 위협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경제적으로 실리적인 요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은 언제나 사회 속에 통합되도록 압력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러한 압력은 전후(戰後) 시기 이래로 특히 두드러졌다. 미국 내의 반공산주의 히스테리는 그 문제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군대 증서 제도 GI Bill'(일종의 군장학금 제도로서 군에서 요구하는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대학생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해 주는 제도이다. 지금도 시행 중에 있다 — 옮긴이 주)로 인해서 고등교육에 대한 새로운 전망이 제시되자, 미국 인구의 훨 씬 많은 비율이 대학 수준의 교육을 현실적인 목표로 하게 되었다. 이것은 지식의 생산을 훨씬 더 민주적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 다. 그러나 이것은 대학 재정에 엄청난 부담을 지워주었으며, 대학에 대한 조사를 증가시켰다. 왜냐하면 대학은 이제 더 이상 몇 안되는 특권적인 공간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대학은 전반적으로 사회를 위해 더욱 중요해지는 듯했다. 더욱 중 요한 것은, 냉전의 요구로 인해 정부, 민간 산업, 그리고 대학 사이에 새로운 형태의 협력체계가 생겨났다는 점이다. 대학은 아이 젠하워 대통령이 이른바 '군산복합체'라고 불렀던 것의 필수적인 일부가 되었다.


미국의 신좌파는 이러한 상황에 응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962년 톰 헤이든(Tom Hayden, 60년대에 좌파 학생단체인 <민 주사회를 위한 학생들, 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과 <비폭력학생통합위원회, Student Non-Violent Coordinationg Committee>에서 활동했으며,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환경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 옮긴이 주)이 썼고, <민 주사회를 위한 학생들>에 의해 개정, 비준된 {휴런항 성명서 The Port Huron Statement}에는 "막대한 기금과 다른 민간 금융의 이 해가 재정이 약한 단대와 종합대를 더욱 상업적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사회를 비판적으로 진단하지 못하게 하며, 저항에 적극성을 띠지 못하게 만들었다"라는 비판이 실렸다. 이 주장을 대학과 '현실 세계'의 구별과 비교해 보면, 대학이 자신의 헤테로토피아적인 위치를 유지하지 못한 것을 비난받고 있음은 명백하다.


다소 역설이지만,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의 학생운동은 대학이 그 당시의 정치에 지나치게 개입했다는 이유 뿐만 아니라, 충분히 개입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결국 대학을 비판하는 것으로 끝나게 되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대학이 잘못된 방식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들은 대학이 학생들의 요구에 좀더 민감하게 반응할 것을 요구한 반면, 산업화 논리 에는 부응하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대학과 '현실 세계'의 관심사가 더욱 밀접해질 것을 요구하는 와중에, 대학이 헤테로 토피아가 되지 못하도록 계속적으로 압력을 가하는 꼴이 되었다.


1990년대에 사는 우리가 되돌아봤을 때, 그 당시의 학생운동이 대학과 민간 산업간의 협조관계를 차단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사실, 이 협조관계는 모든 저항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성장해왔다. 그러나 계속되고 있는 협조관계도 문제의 일부분 일 뿐이다. 대학이 기업에서 출자되는 자금으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거나, 혹은 점점 더 많은 대학이 민간 기금을 염두에 두고 그 들의 연구를 착수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대학이 변질되어 온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최근 몇 년 동안, 대학은 민간 산업처럼 기능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재구성해 왔다. 전통적인 대학의 내부 논리는 기업의 논리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다. 즉, 대학에 차별적 특징을 부여해 주던 규칙과 의식들은 '현실 세계'에 만연된 그것들로 수정되거나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사회의 모든 면에서 이러한 경향이 드러나긴 하지만, 이것은 종신재직권(終身在職權) 제도의 쇠퇴를 통해 가장 극적으 로 드러난다. 수백년 동안, 대학은 새로운 교수들이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학부에서 재직할 만한 자질이 있는가를 시험해 왔다. 이 시험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 대학에 따라, 그리고 학부에 따라 점점 다양해졌기 때문에, 이 시험에 사용된 기준은 종종 모호해 졌다. 또한 종신재직권을 부여할 것인가의 여부는 교수의 공적보다는 인격을 바탕으로 많이 결정되었다. 그렇다고 종신재직권의 존엄성이 손상된 것은 아니었다.


최근 산업화에 따른 진전들은 종신재직권의 존엄성에 더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지 말 것을 종용하고 있다. 1960년대 이래 대학원 과정이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박사학위가 남발하게 되었다. 동시에, 상승하는 비용은 대학을 속박하게 되었다. 종신재직권이 부여된 교수는 주요한 투자 대상이며, 그들의 급여는 대학이 받는 이익과 맞아 떨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한번 종신재직교수가 된 사람이 별다른 변화없이 이전처럼 그들의 직무를 수행할 것이라는 어떠한 보장도 없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즉 공적에 따라 합당하 게 댓가를 지불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 대학 당국이 종신재직 교수를 임용할 때에는, 충분히 종신재직교수로서의 자질이 있 는 후보자를 선택할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도외시하기는 어렵다. 특히, 만약에 그것이 종신재직 중인 교수들이 요구하는 일괄 이해(benefits package)에 대한 비용의 지출을 대학당국이 꺼린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면 말이다. 이것이 바로 점점 더 많은 대학의 직 책이 임시고용직으로 전환되고, 종신재직권 또한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는 이유이다.


물론, 대학이 재정적 압박에 직면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학에서 종신재직 제도가 폐지될 수도 있었던 위기는 많았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오늘날 대학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전임자들과 다른 점은 대학에서 기본적으로 가정하 고 있는 대학의 기능에 대해서 의문시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졌다는 것이다. 종신재직권은 그 가치에 관한 합리적인 검열이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존재할 수 있었다. 혹은 좀더 깊이 생각해 볼 때, 검열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전통적인 지각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대는 변해왔다. 오늘날의 대학에서, 신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대학 운영에 있어서 앞서간다는 것은 전통을 역사의 쓰 레기통에 쳐넣고자 하는 '가치의 재평가'이다. 중대한 영향력이 있는 진지한 개혁자들은 사업방식에서 빌려온 모델에 따라 대학을 재조정하고 있다. 경영학이나 컴퓨터 공학과처럼 인기있는 학과는 많은 예산을 책정받기 때문에 더욱 풍요로워진다. 결과적으로 예 술사학과나 외국어학과와 같이 덜 인기있는 학과는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따라서 어떤 학과가 더 많은 예산을 지원 받기 위해서는, 그 학과의 시장 점유율을 높여야만 한다. 이러한 요구에 대한 이면 논리는 명백하다. 그것은 바로 '현실 세계'를 지 배하는 논리, 즉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이다.


그렇다고 대학이 어느 순간에 곧 사라져 버릴 것 같진 않다. 유용한 비교대상으로써 종교계에서는 어땠는가? 대중 매체의 증가는 조직화된 종교에게 거대한 위협으로 등장했다.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종교 단체를 지원해 온 전통적인 공동체들은 갑작스 럽게 '용감한 신세계'(영국 소설가 알도스 헉슬리[Aldous Huxley]가 1932년 발표한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를 인용한 말. 미래를 배경으로 암울한 전체주의 국가를 그렸다 — 옮긴이 주)의 언술과 형상에 함몰되어 버렸다. 이러한 변모는 또다른 기술 발 전과 함께, 이러한 공동체들의 분열을 초래하였다. 젊은이들은 이러한 용감한 신세계를 찾아 그들의 안식처를 떠났다. 뒤에 남겨진 사람들도 그들의 생활이 돌이킬 수 없이 변해버렸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곧 종교의 소멸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최근의 사회운동단체가 제시한 것처럼 종교는 상승 세에 있으며, 특별히 미국과 같이 대중 매체가 발달한 곳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런 운명의 반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종교 지도 자들은 TV 화면에 비친 그들의 모습이 정말로 선지자적인 행동임을 깨달았고, 기술 혁신을 그들의 장점으로 전환시키고자 노력하 는 데에 합의했다. 그들은 그들만의 대중매체를 통해서 대중매체에 저항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칼 맑스 시대 이후로 줄곧, 좌파들은 '자본의 총체화 논리 totalizing logic of capital'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리란 자 본주의가 이 세상에서 비호되는 공간 속으로 침투할 때, 그것이 어떤 것과 접촉하든지 간에 음흉한 결과를 야기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이 표면적으로 이러한 공간의 외형을 변모시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를테면 그 공간의 '분자 구조'를 재배열하여 그 공간이 더 이상 예전처럼 작용할 수 없도록 한다. 그 공간이 자본주의화 되고 나면, 그 공간들은 {시체도둑의 침입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미국의 저예산 SF 영화 감독인 돈 시겔[Don Siegal]이 1956년에 만든 공포 영화. 한 마을에 인간을 숙주로 삼는 괴물들 이 출현해서 발생하는 사건을 그렸다. 1978년에 리메이크됐다 — 옮긴이 주)에서 나오는, 마치 평범한 인간의 형상을 띠지만, 실제 로는 나중에 외계생물체처럼 변모하기 위한 숙주가 되는 것이다.


아마도 {파리 The Fly}(미국의 독립 영화 감독인 커트 뉴먼[Kurt Neumann]이 1958년에 만든 공포 영화. 인간의 머리를 한 파리가 등장한다. 우리에게는 영국의 언더그라운드 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David Cronenberg]가 1986년에 리메이크한 동명의 영 화가 더 잘 알려져 있다 — 옮긴이 주)가 더 적당한 비유일지도 모른다. 종교 운동은 자본주의를 위한 트로이의 목마같은 존재 이 상의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자본주의 역시 종교를 위한 트로이의 목마같은 존재가 되어왔다. 현시대의 사회에서 종교의 부활은 합성의 과정을 통한 결과이다. 즉, 새로운 종교 운동은 SF 영화 속에서 반은 인간을, 반은 파리의 모습을 한 생물과 같다. 결과적 으로, 자본의 총체화 논리는 전통적인 종교의 논리와 융합되기는 했으나, 융합된 만큼 대체되지는 못했다. 대학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거의 그들의 운영방식을 이런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취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대학이 점점 더 '현실 세계'의 기업처럼 작동하도록 만들어서, 대학을 죽음에서 구해내려고 애쓰고 있다. 문제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대학과 그것이 속해 있는 '현실 세계'와의 구별점이 희미해지는 게 과연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그것은 당신이 대학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당신이 나와 같은 좌파라면, 대답은 어려워진다. 대학이 점점 더 다른 부류의 제도와 비슷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자본주의가 사회집단을 표준화시켜 버린다는 우리의 주장을 뒷받침 해준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이론을 무시한 사람들 모두에게 "내가 그렇다고 말했쟎아"라고 크게 외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 써 얻을 수 있는 종류의 만족은 우리가 추구하는 정치적 변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미 확인된 예견을 발견 하는 데서 기쁨을 얻는 것은 단지 그 예견 자체만을 물고 늘어지는 고집스러움 이상은 아니다.


{휴런항 성명서}는 희망의 메시지로 결론을 맺는다. 비록 본문 전반부에서는 대학에 대해 몹시 비판적이긴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대학의 잠재력을 재인식시킴으로써 대학에 대한 어두운 시각을 효과적으로 상쇄하고 있다. 대학이 "사회적 영향력 내에 영 원히 고정된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세계" 속에서 "지식을 조직화, 평가, 전달하는 중심 기관"이며, 군산복합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또한 대학이 "어떤 관점을 가진 개인에게도 개방적일 수 있는 유일한 주류 제도"이기 때문에, 대학은 사회적 변화를 주동하는 공간이다. 적어도 1962년 당시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 후의 학생 운동이 증명해 주듯이, 이것은 냉전 당시의 대학에 대한 예측적인 분석이었다. 미래의 대학에서도 이것이 사 실로 작용할 지 안할 지는 별도의 문제이다. 경영대학원, 성인교육 대학원, 그리고 공학부의 급증에서 알 수 있듯이, 대학은 점점 더 '현실 세계'와 관계를 맺게 된다. 사람들에게 사업에서 성공하는 방법을 강의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작업장이 존재 하지 않는다고 가장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작업장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강요받아서도 안 된다. 대학은 "어떤 관점을 가진 개인에게도 개방적인" 공간, 의견을 달리 해도 상관없는 공간, 일탈을 해도 괜찮은 공간으로 남 아 있어야 한다. 많은 논평가들이 말한 것처럼, 대중을 위한 열린 공간은 급속히 사라져가고 있다. 대부분의 공간들 — 백화점, 운 동 경기장, 극장 — 이 겉으론 대중을 위해 열려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당연히, 거리 혹은 도시의 공원들을 그 렇게 말하는 것처럼, 대학이 그런 의미에서 공공의 공간은 아니다. 그러나 대학은 대중의 공간과 같은 여러 기능들, 그리고 그밖에 도 많은 다른 일들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대학이 그러한 기능들을 확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대학이 현실 세계에서 분리되는 것을 반드시 나쁜 일이라고 인식해서도 안된다. 사실, 이것은 자본주의 원리 에 의한 실제인 '현실 세계'의 횡포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일 중의 하나이다. 사회는 헤테로토피아를 필요로 하며, 그 것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든 문제삼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대학이 헤테로토피아의 범주에 남아있기를 바란다.


[편집자주] 이 글의 출전은 다음과 같다. Charlie Bertsch, "Pedagogy of the Depressed" in Bad Subjects : Political Education for Everyday Life, Issue No.27, September 1996. 이 글이 실린 {배드 서브젝츠}는 미국 UC 버클리 대학의 좌파 학생들이 만든 인터 넷 잡지로서, 이 글을 쓴 찰리 버취는 현재 동 대학교 대학원의 영문학 박사 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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